2007년 8월 8일 수요일

내 맘대로 쓰는 중국 현대사 3부작 – 대약진(大躍進) 운동 上

들어가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중국 현대사의 몇가지 사건이 있었다. 대장정에서 시작하여 대약진, 문화혁명, 천안문, 개혁개방이 그것들이다. 이년여의 중국 생활과 그전부터 보아왔던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언젠가는 정리해서 써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그 방대한 양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최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의 선물을 받아 드디어 그 첫글을 시작하게 된다.


시작하는 지금 시야에 들어오는 사건은 대장정, 대약진, 문화혁명 세가지이다. 삼부작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대약진과 문혁을 먼저 서술하고 가장 먼저 일어났던 대장정을 마지막으로 하고자 한다.


전체 글속에서 중국인명과 지명의 표기는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표기한다. 외국어 표기법에는 어긋나지만 한자권 국가에서는 자국 발음으로 써야 된다는 소박한 믿음이 있다. 한자발음표기가 바로 잡히기를 소망한다. 단 외부에서 인용해오는 사진등의 설명은 변경없이 사용한다.



역사적 사건의 명칭은 중국쪽에서 지칭하는 단어를 기본적으로 사용한다. 한국인으로서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사의 한부분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중국을 바라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이해해주기 바라며 여러 부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인용한 자료들 또한 그러할 수 있다. 저자가 아마추어 인 점을 감안하여 읽어주시기 바라며 지적해주실 부분은 메일이나 덧글로 적어주시기를 바란다.


대약진운동이라 불리는 건설운동은 1958년, 1977년 두번에 걸쳐 중국에서 일어났는데 이하 서술하는 대약진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있었던 것이다.


대약진 운동 – 시작


1957년 말 중국 공산당은 제 1차 5개년 계획(1953-57)을 마무리 지으며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개발 계획의 바탕에는 중국 공산당 즉 모택동의 사회주의 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데 즉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의 완성으로 가기에 제반 토대가 이루어지지 않고있으며 경제, 물질적 토대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 당시의 소련이나 중국은 마르크스 주의가 말하는 혁명이 일어날수밖에 없는 필연적 단계인 산업사회의 초입에도 들어가지 못한 경제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공 내전과 항일전쟁을 통해 집권한 공산당 정권으로서는 당연히 경제 발전을 통한 인민대중의 복지와 날로 심화되어가는 냉전시대에 맞춰 국력을 향상시킬 강한 필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7년 가을 하남성(河南省)에서 수리(水利)건설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곧 이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 운동은 인민대중의 힘을 동원하여 건설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장비나 기술로 안되면 머릿수로 채워보자는 것이다. 이 운동에 자극 받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58년 하북성(河北省) 북대하(北戴河)에서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대약진운동의 전면적 실시를 결정한다. '인민 대중의 혁명적 열정을 동원하면 경제의 대약진도 실현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대규모 조직을 통한 대중동원운동을 시도하게 된다. 이런 전제를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시 지도부의 대장정과 그 결과물인 연안시대, 항일전쟁과 항미원조를 통해 체험한 의식화 된 대중의 힘을 혁명에 이용해온 중국의 특수한 상황이 한몫을 하게 된다.




» 명릉 저수지, 1958년 5월부터 8월 사이에 건설한 이 저수지는 대약진운동이 선도한 최초의 집단노동운동였다. 5월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현장을 측근들과 함께 버스 여섯대에 나누어 타고 몸소
방문하여 30분 동안 흙을 팠다. 땀이 나기 시작하자 차를 마실 겸 멈춘 뒤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주치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를 위해 일한 22년 동안 마오쩌둥이 중노동을 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런데도
마오쩌둥은 고위급 당 지도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관리라면 여기 있는 우리를 포함하여 누구든 힘 닿는데까지 육체노동에 참여해아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과 주변 농촌 주민들은 불볕더위와 억수같은
빗속에서 커다란 바위와 엄청난 양의 모래를 다른 아무런 장비도없이 운반용 장대와 삽, 바구니만으로 옮겨야 했다. 북폴리오 제공




» 역사 수정되다, 1958년 5월 마오쩌둥이 곁에 있는 혁명용사 펑전과 함께 명릉 저수지에서 땅을 파고 있다.(사진위) 이 사진은 대중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자하는 마오쩌둥의 헌신적인 애정의 증거로 널리 배포되었다. 당시에는 펑전이
서기였지만 1966년 숙청당한 뒤로 사진이 당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래 사진으로 수정했다.
북폴리오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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